중세 유럽의 역사 - 비잔티움과 봉건 기독교
일반적으로 중세 시대를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때부터 민족국가가 발생한 16세기 초기 근대의 시작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 서구 기독교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콜롬비아와의 교류가 가능해진 유럽의 해외 확장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잔티움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를 최초의 비잔틴 황제로 간주합니다. 324년에 제국 수도를 니코메디아에서 비잔티음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 또는 신 로마라는 노바 로마로 재건하였습니다. 로마 자체는 디오클레티아노스 통치 이후 수도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는 제국의 시작을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치와 기독교가 이교 로마 종교를 종식적으로 대체한 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는 395년 토오도시우스가 사망한 후 제국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476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때 전통적으로 마지막 서부 황제로 여겼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었고 그리스 동부에서 황제에게 유일한 제국의 권위가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라틴어 제목과 용법이 공식적으로 그리스어 버전으로 대체된 헤라클리우스 시대에 제국이 재편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전환은 점진적이었고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새로운 수도를 전환한 330년에는 헬레니즘화의 과정과 기독교화의 증가가 이미 진행중이었습니다. 제국은 일반적으로 그 이후에 끝이 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541년 ~ 542년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비잔틴 제국을 휩쓴 전염병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전 세계적으로 1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잇습니다. 541년에서 700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약 50%가 감소하였습니다. 또한 이슬람 정복의 성공에 기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비잔티움은 존재하고 있던 기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인 세력 중 하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중세 초기
초기 중세 시대는 500년에서 1000년까지 대략 5세기에 걸쳐 있었습니다. 유럽의 동쪽과 남동부에 새로운 지배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7세기부터 비잔틴의 역사는 이슬람과 칼리프의 부상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아랍인들은 처음부터 로마 시리아와 로마 메소포타미아에 들어간 라시둔 칼리프의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르크 휘하의 역사적 로마 영토를 침략했습니다. 비잔틴과 이웃 사산 왕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각하게 국권이 약화됨에 따라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장기간 지속되고 빈번한 비잔틴과 사산 전쟁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칼리프 이슬람 교도를 완전히 전복시켰고 페르시아 제국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로마 팔레스타인 로마 이집트 소아시아와 로마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결정적으로 정복했습니다. 서기 7세기 중반에 이슬람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이슬람은 코카서스 지역에 침투했으며 그 일부는 나중에 영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에 의한 정복을 포함하는 이러한 경향과 이슬람의 전파는 우마르의 후계자와 지중해 북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다음 세기에 걸쳐 무슬림 군대는 키프로스 몰타 크레타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포함한 더 많은 유럽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파니아의 무슬림 정복은 무어인이 711년 베르베르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 휘하의 기독교서 고트족 히스파니아 왕국을 침략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히스파니아는 4월 30일 지브롤터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였습니다. 타리크의 군대는 다음 해에 그의 아랍 상관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8년의 전쟁 기간 동안 북서부의 작은 지역 아스투리아싀 지역과 피레네 산맥의 대부분 바스크 지역을 제외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711년에 서고트족 히스파니아는 두 명의 서고트족 구혼자가 연루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내부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권세가 매우 약화 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히스파노와 서고트족 사회 내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정복을 하였습니다. 아랍인 알 안다루스의 지휘 하에 이 영토는 확장중인 우마야드 제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포위는 불가리아 테르벨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고 우마이야 왕조를 약화시키고 위신을 떨어뜨렸습니다. 722년 서고트족 귀족 돈 펠라요는 무누자의 이슬람 군대에 맞서기 위해 300명의 아스투르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콘바돈가 전투에서 아스투레스는 은퇴하고 물러나기로 결심한 아랍문스를 물리쳤습니다. 기독교의 승리는 국토회복 전쟁인 레콩퀘스타의 시작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설립을 의미했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첫 번째 군주는 돈 펠라요였습니다. 정복자들은 유럽에서 영토 확장을 계속 하였고 피레네 산맥을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족의 지도자 샤를 마르텔에게 패배하였습니다. 756년 우마이야족은 이베리아 반도에 독립 토후국을 세웠습니다.
봉건 기독교
신성 로마제국은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일부인 샤를마뉴가 교황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면서 800년 경에 등장했습니다. 현대 프랑스 독일에 기반을 둔 샤를마뉴의 제국은 현재의 헝가리 이탈리아 보헤미아 니더작센 스페인으로 확장하였습니다. 샤를마뉴와 샤를마뉴의 아버지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도움을 원했던 교황과 동맹을 맺어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샤를마뉴의 죽음은 888년에 완전히 붕괴된 왕조의 종말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권력의 분열을 이 지역의 자치 움직임을 이끌었고 왕조 형성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동쪽으로는 불가리아가 681년에 건국되어 최초의 슬라브 국가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불가리아 제국은 수세기 동안 발칸 반도의 지배를 위한 비잔티움의 주요 경쟁자였으며 9세기부터 슬라브 유럽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제국은 서기 9세기에 프레슬라브 문학 학교에서 키릴 문자를 작성하였으며 황제 시메온 1세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 문화 번영의 황금기를 주도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레이트 모라비아와 두 개의 주 키에반 루스는 9세기에 각각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서 나타났습니다. 9세기 후반과 10세기에 북부와 서부 유럽은 롱쉽과 같은 고급 항해 선박으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다른 국가를 습격하게 되었고 무역 정복 및 정착한 바이킹의 힘과 영향력을 느꼈습니다. 바이킹은 앵글로 색슨족과 프랑크족 스코틀랜드인에게 문화적 영향을 남겼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유럽 본토를 약탈했고 불가리아, 아랍인을 약탈했습니다. 10세기에는 폴란드와 새로 정착한 헝가리 왕국을 포함한 중부 유럽에 독립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크로아티아 왕국도 발칸 반도에 나타났습니다. 1000년 경에 끝나느 후속 기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을 약화시킨 봉건제가 더욱 성장했습니다. 동류업에서 볼가 불리아는 알 미쉬 1세가 아흐마드 이븐 파드란의 선교적 노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921년에 이슬람 국가가 되었습니다. 중세 초기의 노예 제도는 약 1000년 경 서유럽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농노로 대체되었습니다. 노예 제도가 계속 번성했던 영국과 이슬람 세계와 연결된 주변 지역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교회 규칙은 기독교인의 노예 제도를 억압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 전환이 1000년 경에 상당히 갑작스러웠다고 주장하지만 일부는 약 300년에서 1000년으로 점진적인 전환을 했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럽의 역사가 지속되면서 유럽의 시간은 중세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비잔티움이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었고 중세 초기에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문화가 유럽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면서 이로 인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