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서 제국주의로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789년부터 1914년까지 긴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럽 전역은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시작된 급격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보였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유럽의 정치지도자가 개편된 후 유럽은 민족주의의 부상 러시아 제국의 부상 대영 제국의 절정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경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부상으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사건의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산업 형명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농업 제조업 운송 분야의 주요 변화가 영국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미국과 서유럽으로 확산된 기간으로 산업화로 계속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기술 발전 특히 증기 기고나의 활용은 산업화 과정의 주요 촉매제였습니다. 18세기 중반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섬유 산업의 기계화 제철 기술의 발달 석탄의 주요 연료 사용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무역 확장은 운하 개선된 도로 및 철도의 도입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증기 동력은 주로 석탄 연료로 움직였고 동력 기계는 주로 섬유를 제조하였습니다. 증기 동력과 동력 기계는 생산 능력의 극적인 증가를 뒷받침하였습니다. 19세기의 처음 20년 동안 모든 금속 공장 기계의 개발은 다른 산업의 제주를 위한 더 많은 생산 기계의 제조를 촉진했습니다. 그 영향은 19세기 동안 서유럽과 북미 지역 전역으로 퍼져 결국 세계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프랑스 혁명
역사가 알 팔머와 존 콜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에 빠졌고 세상은 그 이후로 예전과 같이 않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혁명 시대 전체에서 단연코 가장 중대한 격변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구 체제를 현재 사회로 바꾸어놓았고 그 극단에서는 매우 급진적이어서 이후의 모든 혁명 운동은 이를 자신들의 전신으로 회고했습니다. 1760년대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역할이 모든 혁명에서 결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시대는 군주들에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러시아의 차르 바오로 1세가 암살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당했습니다. 더욱이 스페인의 카를 4세와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7세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폐위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황제와 그가 다양한 유럽 왕좌에 앉힌 모든 친척들도 폐위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 황제는 왕위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조지 3세는 첫 번째 대영 제국의 더 나은 부분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대서양 세계에서 동일한 민주주의 세력의 산물이었고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 역사가 프랑스와 아우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은 봉건제도의 억압 개인의 해방 토지 재산의 더 큰 분할 귀족 출신의 특권의 폐지 평등의 확립 삶의 단순화 등.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단지 민족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혁명과 달랐습니다. 1775년에서 1783년 일어난 미국 혁명은 유럽의 강대국에 대한 식민지의 첫 번째 성공적인 반란이었습니다. 미국 혁명은 토마스 제퍼슨의 말처럼 계몽주의 원칙에 기초한 입장인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귀족을 거부하고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조지 워싱턴의 주도 아래 공화정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은 국가를 거의 파산시킬 뻔 했습니다. 재정 개혁에 대한 반복적인 시도가 실패한 후 루이 16세는 성직자 귀족 평민의 3가지 영지로 구성된 국가의 대표 기구인 영재 총독을 소집해야 했습니다. 나머지 두 의원이 합류한 제 3 신분은 스스로를 국회라고 선언하고 프랑스가 헌법을 갖고 7월에 제헌 의회를 창설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동시에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의회는 입헌군주제를 원했고 그 후 2년 동안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봉건제 폐지 프랑스와 로마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 등 다양한 법률을 통과 시켰습니다. 처음에 왕은 이러한 변화에 동의하고 백성들에게 합리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위협과 함께 반왕정주의가 고조되자 왕은 도망쳤고 프랑스의 적군과 합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체포되었고 1793년 1월 21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선언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1792년 9월 20일 국민 회의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언했습니다. 전쟁의 비상 사태로 인해 국민 대회는 자코뱅 클럽의 막시밀리앙 드 로베르피에르가 관리하는 공공 안전 위원회를 설립하여 국가의 집행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위원회는 공포정치를 시작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주로 귀족과 혁명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40000명의 사람들이 파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파리 내부의 긴장으로 인해 위원회는 종종 증거가 희박하다는 말로 급진주의에 대한 주장과 의혹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갔고 새로운 테러를 부추겼습니다. 이 단계가 시작되고 몇 달이 지나자 로베르피에르와 그의 분파 예를 들면 마담 롤랑과 조르주에 의해 점점 더 많은 저명한 혁명가들이 단두에 파견되었습니다. 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반혁명 봉기가 잔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정권은 1794년 7월 27일 발생한 테르미도르의 쿠테타로 인해 전복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정권은 테러를 종식 시켰고 로베스피에르의 극단적인 정책을 완화하였습니다.
나폴레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가 중 한 사람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수 많은 유럽의 적들에 대해 위대한 승리로 이끈 사람이었습니다. 출신은 소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었고 1814년 강제 퇴위 당할 때까지 유럽의 외교 정치 법률의 많은 부분을 재편성했습니다. 1815년 그의 100일 복귀는 워털로 전투에서 실패했고 외딴 섬에서 망명하고 있던 도중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많은 프랑스인에게는 위대한 영웅으로 영국인들과 다른 나라에게는 위대한 악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프랑스 장군이 되었고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평화를 요구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799년 11월 9일 부뤼메르에서 나폴레옹은 허약한 정부를 전복하고 자신이 지배했던 영사관으로 교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교회를 회복하였고 세금을 낮게 유지하고 파리에서 권력을 중앙 집중화 하고 전쟁에서 영광을 획득함으로써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1804년 그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지만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새로운 영국 동맹인 제3차 연합으로 인해 그는 대륙으로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팔가 전투였고 영국 침공 계획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타리아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오스트리아를 연합군에서 철수 시키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결성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산시켰습니다. 1806년 제4차 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연합이 결성되었지만 나폴레옹은 10월 14일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쳤고 독일로 진군하여 1807년 6월 14일 프리들란트에서 러시아 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때 세워진 틸지트 조약은 유럽을 프랑스와 러시아로 나누게 되었고 바르샤바 공국을 세웠습니다. 1812년 6월 12일 나폴레옹은 약 7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습니다. 스몰렌스크와 보도리노 나폴레옹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둔 후 모스크바는 퇴각하는 러시아 군대에 의해 불타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철수해야 했습니다. 후퇴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군사들은 여러가지 괴롭힘을 당했고 질병과 기아를 겪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하 중 20000명만이 전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1813년이 되자 전세는 나폴레옹에게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7개국 연합 군에게 패하고 6일 전역 후 퇴위가 되었고 파리를 점령 당했습니다.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그는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에 프랑스로 돌아와 군대를 모았지만 마침내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에게 패하고 남대서양의 작은 영국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유럽은 근세 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전 세계가 혁명으로 들끓었고,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공화정을 세웠고, 그 가운데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수 많은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승리는 없다는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위대했던 군인이자 황제였던 나폴레옹도 패배하게 되고 영국의 섬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