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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선사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과 후의 남미 대륙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에 남미의 원주민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문명과 문화를 발달 시키며 살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남미의 생명의 강과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에 대해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카냐리

카냐리는 유럽인과 접촉할 당시 타냐리와 아주아이의 오늘날 에콰도르 지방의 토착 원주민이었습니다. 남미의 토착 원주민인 카냐리는 선진 건축과 종교적 신념을 가진 정교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냐리의 유해 대부분은 잉카와 나중에 스페인의 공격으로 불타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카냐리의 오래된 도시 구아폰델릭은 처음에는 잉카의 도시인 토미팜바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식민 도시인 쿠엔카로 두 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도시를 콜롬비아의 신화에 나오는 황금으로 지어진 도시인 엘도라도라고 믿었습니다. 카냐리는 투팍 유판키에게 함락될 때까지 수년 동안 맹렬히 저항해서 잉카의 침략을 물리친 것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잉카는 카냐리를 정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카냐리 공주인 파차와 결혼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후손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카냐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치브찬 

치브차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는 히스패닉 이전 콜롬비아 문화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도 가장 발전했었습니다. 치브찬은 두 개의 언어 하위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아르와카치밀라 언어와 타이로나 칸쿠아모 코기 아르후아코 치미라 및 치타레로 사람들과 쿠나 콜롬비안 언어인 쿠나 누타베 모티론 우와 라체 구아네 수타가오 및 무이스카 등으로 나뉩니다. 

 

무이스카 

남미의 토착 민족 중 무이스카는 가장 진보된 민족이었습니다. 아메리카의 4대 문명 중 하나를 형성하였습니다. 페루의 잉카와 더불어 무이스카 민족은 남미의 두 개의 발달되고 전문화된 사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무이스카는 치브차 언어 버전에서 사람을 의미합니다. 무이스카인들은 알티플라노 쿤이보야센세와 콜롬비아 산맥 동부 산맥의 높은 고원과 텐자 계곡과 같은 주변 계곡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서기 800년을 기준으로 무이스카의 역사는 헤레라 시대를 계승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무이스카 연방이라고 불리는 느슨한 통치자 연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스페인 정복 당시 무이스카의 통치 범위는 약 25,000평방 킬로미터의 표면적과 300,000에서 200,000명 사이의 총 인구를 가진 남부 산탄테르의 작은 부분과 함께 현대 부서인 쿤디나마르카와 보야카에 퍼졌습니다. 무이스카는 지파퀴라와 네모콘의 광산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다양한 소금 광산의 소금물에서 암염을 추출하고 거래한 덕분에 소금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금의 추출 과정은 무이스카 여성들의 독점적인 작업이었고 치브차와 아라왁 및 아리반을 사용하는 이웃 원주민 그룹과의 높은 평가를 받는 교역의 중추를 형성했습니다. 소금과 작은 면직물 큰 맨틀과 도자기등을 물물교환으로 사용하여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이스카인들의 경제적 기반은 본질적으로 농업이었고 홍적세의 비옥한 토양에서 많은 곡식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약 30,000년까지 보고타 사바나에 존재했던 훔볼트 호수와 그들의 농작물은 높은 계단식 논과 둔덕에서 관개와 배수를 사용하여 경작되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무이스카 인들은 툰호스라는 봉헌 제물로 대표되는 고급 금 세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고급 금 세공품은 전 세계의 박물관 컬렉션으로 퍼져갔습니다. 유명한 무이스카 뗏목과 콜롬비아 수도의 보고타에 있는 뮤제오 델 오로 컬렉션이 중심이 되어 알티플라노 주민들의 숙련된 금 세공을 보여줍니다. 무이스카는 남아메리카에서 동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콜럼버스 이전의 문명이었습니다. 금과 툼바가로 알려진 무이스카 인들이 정교하게 만든 금과 은 구리의 합금은 황금 도시인 엘도라도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엘도라도는 땅과 도시 또는 황금의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전해졌습니다. 카리브해의 도시 산타 마르타에 상륙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풍부한 금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금을 차지하기 위해 1536년 4월 곤잘로 지메네즈 데 퀘사다와 그의 형제인 에르난 페레즈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 역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스페인 정복 함대를 조직했습니다. 혹독한 기후로 인해 군인의 80%가 사망한 1년의 원정 끝에 카이만과 재규어와 같은 육식 동물과 길을 따라 발결된 토착민의 빈번한 공격과 지파보고타 사바나에 있는 바카타의 바카타는 1537년 4월 20일 스페인군에게 구타를 당했고 모한 포폰이 예언한대로 자신의 피로 목욕을 하면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존 

오랫동안 학자들은 아마존 숲이 소수의 수렵과 채집 부족에 의해 점령되고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고고학자인 베티 제이 메거스는 자신의 책인 아마조니아 위조된 낙원의 인간과 문화에 설명된 대로 위의 주장을 믿는 지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아마존 지역의 인구 밀도가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부터 서기 0년에서 1250년 사이에 삼림이 파괴된 땅에서 수많은 지형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추가 발견은 콜럼버스 이전 문명으로 조직된 고도로 발달되고 인구가 많은 문화가 숲에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BBC의 다큐멘터리 부자연스러운 역사를 통해서 아마존 열대 우림은 원시 확무지가 아니라 삼림 정원 가꾸기와 같은 관행을 통해 적어도 11000년 동안 인간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존강을 따라서 여행을 한 최초의 유럽인은 1542년에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였습니다. BBC 다큐멘터리 부자연스러운 역사에서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과장하기보다는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의 관찰이 옳았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문명은 1540년대에 아마존을 따라 번성했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토착민들이 면역이 없었던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의 확산으로 문명이 황폐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약500만 명의 원주민들이 1500년에 아마존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마라호와 같은 조밀한 해안 정착지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내륙 거주자들은 1900년까지 인구는 100만명으로 떨어졌고 1980년 초에는 200000명 미만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은 비옥한 테라 프레타 즉 검은 흙이 아마존의 넓은 숲 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토양이 토착 토양 관리의 산물이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토양의 개발로 인해 이전에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농업과 조림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아마존 열대우림의 상당 부분은 이전에 가장된 것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보다는 아마도 수세기 동안 인간이 관리한 결과라고 보고있습니다. 신구아노스 부족 지역세ㅓ 2003년 미하엘 헤켄베르거와 동료들에 의해 이 거대한 중간 숲 아마존 정착지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유적 중에는 건설된 도로와 다리 및 대형 광장이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 대륙은 콜롬비아와 서구 열강이 발견하기 전까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노르테 치코라는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카냐리라고 하는 부족이 존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존재했던 부족으로는 치브찬 무이스카 등이 있습니다. 아마존에는 수 많은 부족들이 살았으며 그들이 자연과 하나되어서 자연을 돌보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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