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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이르러 남미에서는 군사 세력이 정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원하는 국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이 좌파 성향을 띄고 있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군사 정권과 혁명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정부는 미국에 동조하는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전복되거나 밀려났습니다. 이들은 수만 명의 정치범을 구금하였으며 이들 중 다수는 고뭋 및 살해당했습니다. 국가 간 협력에 대해서는 콘도르 작전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 이외에도 경제적으로 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의 이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내부 전복에 대한 국가 안보라는 미국의 냉전 교리 안에 자신들의 행동을 배치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여 페루는 내부 갈등을 겪었습니다.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과 빛나는 길에 그 갈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혁명운동과 우익군사독재가 만연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1980년대부터 대륙에 민주화의 물결이 일었고 민주주의 통치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부패 혐의는 여전히 일반적이며 몇몇 국가에서는 정상적인 민간 계승이 계속 되었지만 대통령의 사임을 강요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국제 부채는 1980년대 부채 위기 1990년대 중반 멕시코 페소 위기 아르헨티나의 2001년 채무 불이행과 같은 사례와 함께 반복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
표준 개혁 패키지로 간주되었던 일련의 특정 경제 정책 처방은 위기에 처한 개발 도상국을 위한 국제 통화 기금과 세계 은행 및 미 재무부와 같은 워싱턴 D.C 기반 기관에 의해 1980년대와 1990년대 추진되었습니다. 워싱컨 컨센서스는 표준 개혁 패키지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10가지 경제 정책 처방의 집합체입니다. 위기에 빠진 개발 도상국을 국제 통화 기금 세계 은행 및 미국 법무부와 같은 기반 기관에서 도와주는 정책이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는 1989년 영국 경제학자인 존 윌리엄슨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거시경제 안정화 무역과 투자 모두에 대한 경제 개방 국내 경제 내 시장 세력 확대와 같은 영역에서 자유 시장 촉진 정책을 처방했습니다. 일리엄슨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에 워싱턴 컨센서스는 윌리엄슨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시장 기반 접근 방식 때때로 시장 근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용어에 담긴 두 가지 대안적 정의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윌리엄슨은 자신의 10개의 독창적이고 좁게 정의된 처방이 모성과 애플 파이의 지위를 크게 획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광범위하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신자유주의 선언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이후의 더 젋은 정의는 또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고 합리적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느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논쟁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합의 부족을 반영하지만 관련된 정책 처방의 장점과 결과에 대한 실질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개발도상국의 세계 시장 개방에 대한 최초의 합의의 강조점 및 또는 틀림없이 국가의 핵심 기능을 희생시키면서 국내 시장 세력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과도한 초점을 맞추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평론가들에게 있어 문제는 제도 구축과 같은 영역을 포함하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한 기회를 개선하기 위한 표적화된 노력을 포함하여 누락된 것입니다.
21세기 남미
좌익화
BBC에 의하면 핑크 타이드의 공통 요소는 1990년대 초반에 미국이 추진한 공개 시장과 민영화의 혼합인 워싱턴 컨센서스로 알려진 것과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핑크 타이드의 대표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히너에 의하면 베네수엘라의 휴고 차베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와 볼리비아의 예보 모랄레스가 삼총사였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좌파의 대표 3인방이었습니다. 2005년까지 BBC는 남미의 3억 5000만 인구 중 4명 중 3명은 지난 6년 동안 선출된 좌파 성향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좌파 이데올로기를 수용한다고 공식 선언하는 라틴 아메리카 정부가 여러 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적색 청색 선거 후지도와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경향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분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적 비영리 싱크탱크 정책 연구소에 의하면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멕시코의 선거에 대한 심층 분석은 분홍조 해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좌파쪽으로 희석된 추세가 대륙을 휩쓸고 있습니다. 각 국가와 지역 전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복잡성을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수량화하기는 어렵지만 그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정책 연구 연구소에 의하면 2006년 남미 국가 정상 회담과 민족 통합을 위한 사회 포럼 회의에서 예전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인 담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특정 토론이 지금은 공개 토론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핑크 타이드
팡크 타이드 혹은 좌회전이라는 용어는 21세기 현재 정치 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좌파 이데올로기 특히 좌파 정치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온론과 다른 곳곳에서 많이 사용을 하였습니다. 일부 남미 국가에서는 좌파 정당이 집권을 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즈 브라질의 루이즈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및 딜마 루세프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 아르헨티나의 네스토 및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즈 데 키르치네르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즈 및 호세 무이카 칠레의 라고스 및 바체렛 모랄레스 에불리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는 모두 자신들을 사회주의자 라틴아메리카주의자 혹은 반제국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남미의 정치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남미 정부는 정치적 좌파로 방향을 이동했습니다.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페루 베네수엘라에서 좌파 지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은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여 더 큰 글로벌 통합을 저해하지만 지역 발전을 돕고 있습니다. 2008년에는 남미 국가 연합이 설립되어 기존의 두 관세 동맹엔 메르코수르와 안딘 커뮤니티를 통합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무역 블록을 형성했습니다. 조직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 경제 발전 공동 방위 정책 및 관세 철폐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럽 연합 스타일의 정치적 통합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노엄 촘스키에 의하면 남미국가연합은 유럽 정복 이후 처음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통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미는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서구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게 되었고 언어와 문화를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과 혁명이 있었고, 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남미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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